좋은 옷은 왜 가볍게 느껴질까
같은 길이의 두 코트는 왜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을까. 직접 만들고 입으며 배운 것들.

내가 공부하던 Savile Row Academy 바로 옆에는 Huntsman이 있었다.
Savile Row에 있다 보면 주변의 100년 넘은 테일러 숍에서 일하는 프론트맨, 커터, 메이커, 테일러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이 생긴다. 나 역시 헌츠맨의 프론트맨 Johnny를 비롯해 Huntsman의 Creative Director이자 Head Cutter인 Campbell Carey와도 근처 펍에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거리인 만큼 그들에게서는 옷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비스포크 테일러링을 배우며 오래 기억하게 된 것이 있다.
좋은 테일러링은 사람을 옷에 맞추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몸을 균형 있게 보이게 하면서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해 준다.
사람의 몸은 자로 잰 듯 반듯하지 않다.
양쪽 어깨 높이가 다르고, 등이 조금 굽기도 하고, 골반이 돌아가 있기도 한다. 서 있는 자세와 걷는 자세도 모두 다르다.
그런데 잘 만든 비스포크 재킷을 입으면 그런 차이가 자연스럽게 보완된다.
밖에서 보면 단단하다.
어깨가 서고 허리가 잡히고 가슴에서 밑단까지 선이 정확하게 떨어진다.
그런데 그 안의 몸은 이상할 정도로 자유롭다.
조금 과장하면 이런 느낌이다.
딱딱한 철갑옷처럼 보이는데, 입은 사람은 트레이닝복처럼 편안한 것.
단단한 모양과 편한 착용감을 함께 만드는 것이 테일러링의 기술이다.
Huntsman 특유의 재킷도 어깨가 단단하게 서고, 진동선이 높으며, 허리는 잘록하고 밑자락은 퍼진다. 형태가 뚜렷한 옷이다. GQ에 따르면 이 스타일은 Colin Hammick 같은 커터들을 거치며 발전했다. Campbell Carey 역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헤드 커터를 함께 맡아왔다. British GQ
Huntsman은 20개가 넘는 치수를 잴 뿐 아니라, 고객이 어떻게 서고 앉고 움직이는지도 관찰해 개인별 종이 패턴에 반영한다고 설명한다. 공식 안내에 따르면 한 벌에 최대 80시간가량의 수작업과 여러 차례의 피팅이 들어간다. Huntsman Savile Row
나에게 마스터 테일러링을 직접 전수해 준 Prof. Andrew Ramroop OBE에게서도 그 과정을 보았다. 내가 지켜본 작업에서는 기본 피팅만 해도 세 차례 이상 이어지곤 했다. 고객들도 그저 옷이 나오기만 기다리지는 않았다. 피팅할 때마다 자기 몸에 맞게 달라지는 옷을 보며 그 과정 자체를 즐겼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은 좋은 옷이 감각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옷의 무게를 어떻게 분산할지, 몸 위에서 어떤 균형과 실루엣을 만들지 결정하는 데에는 다양한 수학적 공식과 계산이 들어갔다. 숫자로 설계하고, 실제 몸 위에서 확인하고, 다시 수정하는 일. 계산이 맞는지는 결국 고객이 입어 봐야 알았다. 여러 번 고치면서 쉐입도 잡고, 몸에 걸리는 불편도 줄여 갔다.
그런데 요즘 날씨가 가을로 넘어가면서 문득 내가 예전에 만들었던 두 벌의 클래식 코트가 생각났다.
하나는 성공했고, 하나는 실패했다
하나는 발마칸 코트였다.
1m에 30만 원을 훌쩍 넘었던 Harris Tweed 원단을 사용했다.
완성하고 입어봤을 때 놀랐던 것은 가벼움이었다.
충분히 따뜻하고, 코트 자체의 형태도 제대로 유지되는데 몸에서는 날아갈 듯 가벼웠다.
다른 하나는 폴로 코트였다.
약간의 폴리에스터가 혼방된 울 원단을 사용했다.
실루엣은 정말 좋았다.
쉐입 하나는 끝내줬다.
묵직하게 떨어지는 선도 좋았고 폴로 코트 특유의 존재감도 제대로 나왔다.
문제는 무게였다.
세상 무거웠다.
입고 있으면 어깨 위에 모래주머니를 하나 얹어놓은 느낌이었다.
두 코트의 기장은 비슷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역시 좋은 천연소재가 가볍구나.”
그런데 옷을 더 공부하고 입어볼수록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에는 두 개의 무게가 있다
옷에는 저울로 재는 무게와 몸이 느끼는 무게가 있다.
둘은 같지 않다.
실제 중량이 더 나가는 코트가 오히려 편할 수도 있고, 더 가벼운 코트가 몇 시간 뒤에는 목과 어깨를 훨씬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옷의 무게를 피부 전체로 균등하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코트나 재킷에서는 목 뒤와 승모근 주변에 하중이 집중되면 실제 중량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진다.
반대로 같은 무게라도 목과 어깨, 등 위쪽으로 하중이 고르게 나뉘면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백팩과 비슷하다.
똑같은 5kg을 넣어도 스트랩과 등판이 잘못 설계된 가방은 죽도록 무겁고, 잘 설계된 가방은 상대적으로 가볍다.
옷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좋은 패턴은 단순히 실루엣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패턴을 만든다는 건 옷의 무게를 몸 어디에 어떻게 나눠 실을지 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소재도 중요하다
다만 여기서 천연섬유 = 가볍다 / 합성섬유 = 무겁다고 단순화하면 안 된다.
실제 원단의 무게는 섬유 종류뿐 아니라 실의 굵기와 꼬임, 조직, 밀도, GSM, 가공, 그리고 완성된 옷에서는 심지와 안감 같은 부자재까지 영향을 준다.
그래서 좋은 소재란 반드시 천연섬유 함량이 가장 높은 소재도 아니고 가장 비싼 소재도 아니다.
디자인이 원하는 물성을 가장 정확하게 구현해주는 소재가 좋은 소재다.
가볍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코트를 원한다면 울이나 알파카가 잘 맞을 수 있다.
반대로 아래로 묵직하게 떨어지는 실루엣이나 강한 구조감이 필요하다면 밀도 높은 원단이나 적절한 합성섬유 혼방이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내 폴로 코트도 그랬다.
무거웠지만 그 무게가 만들어낸 형태는 훌륭했다.
그러니까 실패의 원인을 폴리에스터 하나에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질문은 이것이다.
그 아름다운 형태를 유지하면서 몸이 느끼는 무게까지 줄일 수는 없었을까?
여기서 소재의 문제가 패턴의 문제와 만난다.
소재에 맞는 패턴이 따로 있다
아무리 비싼 원단이라도 패턴과 맞지 않으면 좋은 옷이 되지 않는다.
가볍고 부드러운 원단으로 각이 잡힌 옷을 만들거나, 뻣뻣하고 묵직한 원단으로 몸을 따라 흐르는 옷을 만들 수도 있다.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원단의 성질과 만들려는 형태가 맞지 않아 무리가 생긴다.
좋은 옷에서는 반대다.
원단이 늘어나고 떨어지는 성질에 맞춰 패턴을 잡으면, 억지로 누르거나 당기지 않아도 원하는 형태가 나온다.
그래서 좋은 옷을
좋은 소재 + 좋은 패턴
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조금 부족하다.
좋은 옷은 소재와 패턴 사이의 좋은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모델리스트가 있다
패션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거의 항상 디자이너의 이름을 기억한다.
요즘에는 디자이너보다 Creative Director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나는 꽤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Creative Director는 단순히 옷 한 벌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이번 시즌에는 어떤 사람이 어떤 옷을 입는 모습을 보여 줄지 정한다. 색과 소재, 비례와 실루엣, 전체적인 분위기를 함께 생각한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옷의 첫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 속 사람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다.
움직이지 않는다.
실제 사람은 걷고, 앉고, 팔을 들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계단을 오른다.
어깨 높이도 다르고 등이 굽기도 하고 몸은 완벽한 좌우대칭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력이 존재한다.
이때부터 모델리스트나 패턴 메이커, 비스포크의 커터가 나설 차례다.
그림 속 옷을 실제로 입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
디자이너가 말한다.
“이 코트는 어깨에서 이렇게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 모델리스트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숫자와 구조로 바꿔야 한다.
어깨 경사를 얼마나 줄 것인가.
목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진동 깊이는 얼마로 할 것인가.
앞뒤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소매를 어떤 각도로 달 것인가.
움직일 여유분은 어디에 얼마나 둘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정하면서도 처음 디자이너가 그렸던 옷처럼 보여야 한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편하게 만들겠다고 품을 무작정 늘리면 원래 실루엣이 무너진다.
반대로 디자인을 지키겠다고 몸의 움직임을 무시하면 사진에서는 아름답지만 입을 수 없는 옷이 된다.
그래서 좋은 모델리스트의 역할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그린 모습을 최대한 살리면서, 입는 사람이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사람.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창작이 있다.
Huntsman이 커터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비슷할 것이다. Campbell Carey는 첫 비스포크를 주문할 때 매장의 마네킹에서 그 집의 스타일을 먼저 살펴보고, 체형에 맞추는 일은 커터를 신뢰하라고 말한다. British GQ
최근 GQ의 Savile Row 취재에서도 커터는 치수만 재는 사람이 아니다. 고객이 걷고 서고 기대는 모습까지 보고 패턴을 고친다. Carey는 비스포크를 스트라디바리우스에 비유하며 이 기술을 지닌 사람이 드물다는 점을 강조한다. British GQ
좋은 디자이너가 좋은 옷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좋은 디자이너 혼자서는 좋은 옷을 만들 수 없다.
좋은 옷에는 여러 사람의 판단과 기술이 들어간다.
Creative Director / Designer는
어떤 옷이어야 하는가를 결정한다.
Modelist / Cutter는
그 옷을 몸에 어떻게 맞출 것인가를 해결한다.
소재를 고를 때는
그 형태를 만들기에 알맞은 성질을 가졌는가를 살핀다.
그리고 메이커와 테일러가 실제 옷으로 완성한다.
그래서 굳이 공식으로 만든다면 덧셈보다 곱셈에 가깝다.
Creative Direction × Material × Pattern Making × Construction
하나가 크게 무너지면 나머지가 아무리 좋아도 결과가 무너진다.
비싼 원단이 나쁜 패턴을 구해주지 못하고, 훌륭한 패턴도 디자인과 맞지 않는 소재의 물성을 완전히 바꿀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소재만 확인할까
옷을 사러 가면 소재 정보는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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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원단 업체의 이름을 내세우기도 한다.
소비자가 이해하기 쉽고 가격으로 환산하기도 쉽다.
그런데 라벨 어디에도 이런 문장은 없다.
“이 코트는 목과 어깨에 걸리는 하중을 분산하도록 패턴을 설계했습니다.”
가봉용 옷을 몇 번 만들고 피팅했는지도 알 수 없다.
앞뒤 균형을 몇 번 고쳤는지, 진동을 몇 mm 조정했는지, 원단의 무게에 맞춰 어깨를 어떻게 바꿨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에도 돈이 든다.
좋은 모델리스트를 구하고, 패턴을 만들고, 가봉하고, 입혀 보고, 고친 뒤 다시 샘플을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소비자가 알아보기 어려운 부분일수록 비용을 줄이려 할 때 먼저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옷을 입으면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소재와 디자인에는 계속 돈을 쓰면서, 몸으로만 느낄 수 있는 패턴에는 점점 덜 투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모든 옷이 지금보다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상품 회전이 빨라지고 한 시즌에 만들어야 하는 SKU가 늘어날수록 여러 번 입어봐야 알 수 있는 품질에 회사가 얼마나 시간과 돈을 쓸 것인가는 충분히 생각해볼 문제다.
좋은 옷은 사진보다 몸이 먼저 안다
그래서 다시 내가 만들었던 두 코트로 돌아온다.
Harris Tweed로 만든 발마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울 혼방으로 만든 폴로 코트는 어깨 위에 모래주머니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폴로 코트의 형태는 정말 아름다웠다.
지금 다시 만든다면 아마 원단의 혼용률만 바꾸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먼저 원단의 실제 중량과 조직을 보고, 심지와 안감을 보고, 패턴의 앞뒤 균형을 다시 보고, 그 무게가 목과 어깨 어디에 걸리는지부터 볼 것 같다.
그러고 나서도 그 폴로 코트 특유의 묵직한 실루엣를 잃지 않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게 좋은 옷을 만드는 일일 테니까.
좋은 소재는 만져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좋은 디자인은 보는 순간 알 수 있다.
그런데 좋은 패턴은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루를 입어보면 안다.
어깨가 편하고, 팔이 자유롭고, 옷이 뒤로 넘어가지 않고, 코트가 자기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때 별생각 없이 말한다.
“이 옷 편하다.”
하지만 그 편안함은 우연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누군가의 굉장히 많은 계산이 들어가 있다.
좋은 소재는 옷을 가볍게 만들 수 있다.
좋은 패턴은 그 무게를 잊게 만들 수 있다.
좋은 디자인은 그 모든 기술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좋은 옷은 어느 하나가 특별히 뛰어난 옷이 아니라 디자인과 소재와 패턴이 서로의 일을 방해하지 않는 옷인지도 모른다.
정말 잘 만든 옷을 보면 세 가지가 왜 그렇게 정해졌는지 납득이 된다.
디자인을 보면 왜 이 소재를 선택했는지 이해되고, 소재를 만지면 왜 이런 패턴을 만들었는지 이해되고, 실제로 입어보면 왜 처음에 이런 디자인을 그렸는지까지 이해된다.
Savile Row에서 내가 봤던 좋은 옷들이 그랬다.
밖에서는 갑옷처럼 단단한데,
그 안의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웠다.
옷은 그렇게 사람의 몸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남겨 둔 질문 / AN OPEN QUESTION
우리는 눈에 보이는 소재와 디자인에는 계속 돈을 쓰면서, 몸으로만 느낄 수 있는 패턴에는 점점 덜 투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Yuri Choi의 개인적인 관찰과 질문을 담았습니다. 참고한 자료는 본문과 출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